포도 알알이 새긴 '삶에 대한 열정' 서양화가 김종학씨 '이미지와 기억'전
199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 식탁에 놓인 음식물 가운데 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이것이다!”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술가적 직관이었다. 서양화가 김종학(55·세종대 교수)과 포도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포도 그림을 그렸다. 글자와 숫자가 찍혀 있는 광고지 포스터에 검정 물감으로 포도 송이를 수박 크기만하게 표현했다.
김종학은 미술계에서 ‘젊은 김종학’으로 불린다. 설악산에서 꽃 그림을 그리는 김종학(72) 화백과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로선 ‘젊은 김종학’이라는 별명이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설악산 김종학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불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원로작가 김종학과는 엄연히 차별화된다.
‘포도’ 작품을 보자.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이것에서 무슨 영감을 얻었다는 것일까? “하찮은 물체들 속에서 생명체의 거대한 에너지를 봅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엄숙과 미소 등 이런 대립적이고 상반된 요소들이 그 속에 뒤섞여 있어요. 제 자신의 의식이 형성된 복합적 환경이 그림을 통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대학 교수를 병행하며 작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에게 치열한 작가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남의 것을 흉내내고 있다”는 자책감이었다. “내가 그리는 작품을 나중에 보니 누군가의 그림을 베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중에 포도나 서양 배 등 일상적인 사물들을 보면서 삶에 대한 열정이랄까, 그런 것들에 집착하게 되고 그림으로 형상화하게 됐습니다.”
그의 작품이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주제로 13일부터 12월6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선보인다. 기존의 포도 그림을 비롯해 ‘불꽃’ ‘월계수’와 아크릴 박스에 자동차 도색 원료인 우레탄으로 그린 ‘청포도’ ‘새우’ ‘꽃’ 등 30여점이다. ‘설악산 김종학’이 꽃 그림으로 유명하듯이 포도 그림으로 각인된 ‘젊은 김종학’에게 우레탄 작업은 상당히 낯설어 보인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포도 작품은 다소 무겁고 심각한 반면 우레탄 작업은 가볍고 경쾌한 이미지를 보여주지요. 파리 시절에는 동서양의 차이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했다면 지금은 세대간의 차이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상반된 이미지가 혼재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바로 제 자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가지 작품에서 관객들이 어떤 느낌을 갖든지 그건 자유입니다.”
4년 만에 갖는 이번 개인전은 2002년 토탈미술관 전시를 보고 반한 이옥경 가나아트갤러리 대표의 성원으로 이뤄졌다. “자연물에 깃든 생명의 힘에 이끌렸다”는 이 대표의 말대로 다양한 언어로 살아 꿈틀거리는, 열정적인 예술혼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기억 너머에 있는 이미지를 화면에 옮겨내는 그의 작품은 과거의 흔적을 동시대의 감성으로 환기시키는 여정과 같다(02-720-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1405721